2010.01.04 21:24

길 위에서 보낸 하루

2010년 첫 출근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통근버스를 타지 않고, 가족과 함께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대중교통으로 출근하기로 했다.
아침 9시에 집을 나서는데 발목까지 쌓인 눈을 보니 출근길이 순탄치 않을 거란 느낌이 팍팍 온다.
평소에는 사당역에서 7000번을 타고 영통까지 가서 영통에서 택시를 갈아타고 회사까지 가곤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날씨인지라 지하철을 타기로 결심을 하고 사당역으로 걸어갔다.
사당역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찰나, 막 계단을 올라온 어떤 남자의 전화통화 소리가 귀에 들렸다.

"글쎄 역에서 내려 밖으로 빠져나오는데만 1시간 걸렸대..."

이 한마디에 지하철을 포기하고 7000번 버스를 기다리는 줄에 가담했다.
기다리는 7000번은 오지 않고 바로 옆줄의 7001번만 거푸 세대째가 온다. 법원사거리에서 내리기로 결정하고 줄을 잽싸게 바꿔 7001번을 올라타자 바로 뒤에 7000번이 온다. --;
사람들이 다 자리에 앉자 버스는 출발하고, 한 100미터쯤은 잘 달렸다.
본격적으로 남태령 고개를 올라가는 구간이 시작되자 정체가 시작되더니 차가 아예 멈춰 서버린다.
창 밖으로 승용차들이 1미터 올라가고 1미터 뒤로 미끄러지고를 반복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점점 시간만 흘러가고 승객들은 수런거리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어수선하다.
지하철 한정거장 거리인 남태령 역을 거의 40여분 걸려 도착하자 열댓명의 승객이 내린다.

남태령 정상에서 과천-봉담 고속국도인 309번 도로 시작점 까지는 내리막길이라 그럭저럭 잘 달렸다.
과천 터널이 저 멀리 보이는 곳에 이르러 차가 멈춰 서더니 꼼짝도 않고 수십분이 흐른다.
승용차들이 대열을 이탈해 차를 돌려 역주행을 시작한다.
기다리다 못한 승객들이 또 우루루 내리고 이제 차에는 열댓명 남아있다.
과천 터널 앞에서만 한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겨우 터널 앞에 도착해보니 버스 한대가 비스듬히 사선으로 미끄러져 퍼져 있어서 차선을 반 이상 막고 있었다.

터널을 거북이걸음으로 지나가고 이제 내리막길이어서 좀 달리려나 싶었는데
학의분기점 시작 부근에서 또 차가 멈춰선다.
운전기사는 앞으로 수원까지 몇시간 걸릴 지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하니 지금이라도 내려서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과천터널을 걸어서 지나가 과천으로 가서 지하철을 탈 것을 권유한다. 한시간 좀 넘게 걸릴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또 다시 우루루 내리고, 이제 차에 남은 사람은 운전기사와, 나, 그리고 다른 승객 2명, 달랑 4명만 남았다.
9시30분 즈음에 버스를 탔는데 시간은 벌써 오후 1시가 훌쩍 넘었다.
책을 읽다가 졸기를 반복하며 차 안에서 기다리는 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배고픔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지 45분 정도 지났는데 50미터도 채 달리지 못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고 통보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려서 살펴보니 7001번 버스 3대와 7000번 버스 2대가 기차놀이를 하고 있었다...

맞은편 차선은 차가 거의 없어서 중앙분리대를 뛰어 넘어 왔던 길을 되짚어 터벅터벅 눈덮인 차도를 걸어가는데
승용차들이 몇대 지나간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매일 아침마다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등교하던 실력을 발휘해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더니 금새 한 대가 선다. (사실 오랜 경력에서 오는 감으로 차가 주행하는 모양새만 봐도 세워줄 만한 차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세워 줄만한 차한테만 손을 흔든다.) 목적지가 사당역이 아니고 양재 방향이어서 양재지하차도까지만 타기로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대화에서 느끼기로는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 듯하다.

차가 과천터널을 지나 과천으로 들어서자, 아까 차에서 내려 과천으로 먼저 떠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반대편 차선에 보인다. 이런 저런 화제로 대화를 이끌며 히치하이커의 필수 덕목인 조수석 기쁨조의 역할을 무사히 완수하고 양재 지하차도 입구에서 내렸다.

사당역까지 가는 두번째 차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대학 교수님이신 듯한데 집은 반포쪽이고 안양에서 무슨 연수가 있어서 갔더니 눈으로 인해 취소되어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신다. 매우 젊어보이는 외모이신데도 아들이 벌써 문산 1사단에서 군생활 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눈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강원도 화천에서 복무했다고 했더니, 자신도 15사단 승리부대라며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신다.

남태령을 넘어갈 수 있을 까,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수방사 군인들이 말끔이 눈을 치워놓아서 평소와 다름없는 속도로 달려 사당역까지 올 수 있었다.

4시간 30분 걸려서 갔던 길을 다시 돌아오는데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가는 길은 답답하고 짜증나는 길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아이리스의 배경으로 나왔던 홋카이도로 짧은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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