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8 23:04

선배의 결혼식장에서 살의를 느끼다.

토요일 정오에 시내의 한 대형 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선배의 결혼식이 있었다.

집에서 자녀들과 놀아 주다가 결혼식장에 10분 쯤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어찌나 하객들이 많은지 그 넓은 볼룸에 앉을 자리가 없었고

먼저 온 선배들 몇 명도 밖에 서서 식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축의금을 접수하고, 1층의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권을 하나 받은 후

아는 사람들 틈에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중 선배 한명이 말했다.

 

"그거 알아? 저기 전 전 대통령 와 있는거."

 

선배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맨 앞쪽에 신랑 부모 바로 옆 테이블에 남들과는 조금 다른 모양의 의자에 앉아 있는 대머리의 뒷 모습이 보였다.

TV에서 많이 보았던 익숙한 모습. 첫 느낌은 그냥 키가 작구나 하는 정도였다.

 

식이 끝나고 테이블마다 음식들이 날라지고, 사진 촬영이 시작되었다.

자리를 차지 못했기에 친구 직장동료 사진촬영에 얼굴을 내밀어 알리바이를 남긴 후 1층의 다른 식당으로 내려가려고 기다리는 동안 내 온 신경은 이미 결혼식과는 무관하게 29만원밖에 없는 대머리 아저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앞으로 나가면서 일부러 문제의 그 테이블 옆으로 지나갔다. 약 3미터 거리. 순간 강풀의 만화 "26년"이 생각났다. 그 만화의 등장인물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얻을 수 없었던 거리가 내게는 이렇게 쉽게 허락되다니. 조금은 허무했다. 신이 만화 주인공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그 어떤 사명을 내게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만화 '26년"의 마지막의 그 총성,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진기사는 표정들이 너무 어둡다고 밝게 웃을 것을 주문했지만 내 표정은 잘 펴지지가 않았다. 앞에 나와 높은데 서게 되니 모든게 한눈에 들어온다. 뽀얗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얼굴. 혈색도 참 좋다. 연신 사람들이 다가와 굽실대며 악수를 청하고, 대머리 아저씨는 호방한 몸짓으로 악수를 하고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고, 음식도 잘 씹어 넘기고 있다.

 

순간, 울컥 하고 가슴속으로부터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살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다시 생각했다.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 어디까지가 인간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신의 영역일까.

하나님이 그를 포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정의"라는 단어의 뜻과, "정의의 하나님" 할 때의 "정의"는 뭔가 다른 단어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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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7 16:41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신경림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 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고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 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윤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


대학교 새내기 시절부터 지갑속에 가지고 다니는 詩.

그 때는 지은이가 누구인지 몰랐었는데

후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신경림 시인의 시로 알려져 있다.

시대가 어수선하다보니

오랫만에 다시 읽는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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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7 16:35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 중에 가장 오래된 책들 중 하나인 이 책을 애틀란타 출장길에 다 읽었다.

비록 소설이라는 방어 장치를 빌었지만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되돌아본 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작업인지...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처럼 소설이 중간에 끊긴 듯한 느낌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 것은

나도 25살 이전까지만의 내 인생을 돌아본다면 아무런 미화 없이 담담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들을 들춰내어 다시 복기해 볼 자신이 없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유년의 기억보다 오히려 시간상 가까운 그 시간들의 디테일들 중에 상당수는 이미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해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완서를 처음 읽다.

또 하나의 수확은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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