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31 20:55

열사여, 머나먼 민주주의여...



이한열 장례식을 맞아 서울거리에는 이한열이 가장 좋아했다는 노래,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가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무수히 많은 인파가 연세대학교로 몰려들었다. 끝없는 역사의 수난 속에서 숨진 안타까운 젊은이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숙연할 대로 숙연해서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무욕의 땅을 찾아가는 배"가 되어 있었다.


장내에는 "몇 시간 전에 진주교도소에서 석방된 문익환 목사님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익환이 교문으로 들어서자 밀물 같은 인파가 문익환의 걸음을 따라 모세의 바다처럼 갈라졌다. 전날 오후에 출감된 이후 겨우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을 뿐 일체 사적인 시간을 갖지 않아서인지 문익환의 움직임은 고요했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에서는 숨막힐 둣한 짙은 감옥 냄새가 풍겼다. 김대중 등 저명인사들의 순서가 진행되면서 재야 대표 문익환도 이내 연단에 섰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군중들은 문익환이 그 시각에 그 장소에 도착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의 침통한 하늘을 향해 눈을 감더니 조용히 두 팔을 벌렸다. 문익환 특유의 세계를 섬기는 자세, 자신의 앞가슴으로 세계를 껴안아버리는 자세, 언제 봐도 겸허와 순정으로 충만한 그 자세를 해보였다. 이윽고 처절하게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죽어간 이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 전태일 열사여! (...) 김상진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26명의 열사 이름을 아무런 순서 없이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대로 외쳐 불렀다. 땅과 하늘에 대고 외치는 절규였다, 그리고 끝. 단 한마디의 군더더기도 없이, 문익환의 외침은 고요하게 퍼져나갔다. 연새대 집회장을 꽉 메운 대중들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감히 어떤 연사도 흉내낼 수 없는 너무도 문익환적인 연설이었다. 한국 군중언어사(史)에 기록될 최고의 연설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고조되어 그 순간에 만들어진 역사의 대열을 빠져나가는 이 없이 대장관을 이루며 시청으로 향했다. 전열에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 등이 서서 어깨를 곁고 앞장섰다. 문익환이 열사 이름을 절반쯤 외웠을 때부터 흘리기 시작한 거대 군중의 눈물은 대열이 아현 고가도로를 넘을 때도 전혀 멈출 기색이 없었다.


- 김형수, 문익환 평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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