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18 22:13

30년전 오늘이 바로 "그 날" 입니다.



작년 이맘때, 2009년 5월 17일부터 22일까지 아내와 나는 어린 딸래미를 데리고 때 이른 휴가를 다녀왔었다.
7월 말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둔 아내를 위해 조금이라도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휴가를 떠났다.
전라남도 화순, 담양, 보성, 광주를 포함한 남도 순례였다.

휴가지로 전라남도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5월"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전라도 땅을 밟아본 것은 두어차례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잠시 찍고 지나가 본 것이 전부였다. 80년의 나는 너무 어렸기에 당시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광주"라는 단어는 내 가슴속에 다듬이돌 만한 무게로 얹혀 있는 일종의 부채였다.

5월에 광주를 꼭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94년이었다. 
당시 읽은 기형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산문집에 보면 기형도가 여행중에 망월동에 갔다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된 선배와, 요절하여 전설이 된 선배의 조우의 배경이 된 광주 망월동의 이미지는 내 머리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작년 오늘 2009년 5월 18일 오후, 드디어 5.18 국립묘지를 찾았다. 
기념식이 열리는 오전 시간에는 차마 그곳을 갈 수가 없었다. 유가족들을 뵐 자신이 없었다.
그날은 날씨가 찌는듯이 무더웠는데, 공식 행사가 모두 끝난 오후 시간인데도 천도교에서 소박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추모 종교행사를 하고 있었다.

묘역을 돌며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이 땅에 머물렀던 시간들의 길이와, 묘비에 새겨진 글귀들을 찬찬히 읽었다. 국립묘지는 여러 묘역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12묘역이었던가 그곳은 묘비명이 "누구누구의 묘"가 아닌 "아무개의 령"으로 쓰여져 있었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어서 이렇게 가묘를 만든 것이 묘역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짦은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날이 5월 22일 오후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


1년이 지났지만 그분의 사진, 동영상을 볼 때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진보의 미래", "운명이다"도 사놓고 아직 표지조차 열어보지 못하고 있다. 

오늘 광주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이 연주되었다.
서울에서는 조화 대신 형형색색의 화환이 배달되었다.

이/  치/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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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7 23:26

빈 집 - 기형도 詩, 백창우 곡,노래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

 

2009년을 보내며 유난히 이 노래의 다음 한 구절이 많이 떠올랐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모두 내려놓고 自由하고 싶다...

 

 

콩밭 개구리 백창우의 목소리로 노래 들을 수 있는 곳

http://blog.naver.com/zaca0412/150026864701

http://blog.naver.com/likeamike/15000833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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